울릉도쟁계와 수토정책
울릉도 쟁계와 수토정책
우산국의 멸망과 조선으로의 왕조교체라는 큰 변혁 이후에도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의 영역이라는 인식은 유지되었다. 조선은 건국초기 자국민의 보호와 일본의 불법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섬에서의 거주와 출입을 금하는 쇄환정책(刷還政策)을 실시했다. 그러나 쇄환정책을 통해 섬을 비워두었다고 해서 조선이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은 다양한 지리지와 지도에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정보를 기록하며 관리해왔다. 또한 울릉도와 독도의 자원가치를 알고 있던 조선 사람들은 이곳을 드나들며 경제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일본인 역시 울릉도와 독도를 드나들었기에 안용복(安龍福)의 도일사건이 발생했다.
안용복은 숙종 때의 사람으로 동래(東來) 출신이었는데, 왜관이 가까이 있어 일본어를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1693년 봄, 고기잡이를 위해 울릉도에 건너갔다가 그곳에서 불법 어로행위를 하던 일본의 오오야 가문(大谷家) 어부들에게 강제로 피랍(1차 도일)되었다. 피랍의 상황에서도 그는 납치의 부당함과 두 섬의 영유권이 조선에 있음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후 그의 송환 처리 과정에서 조선은 두 섬에 대한 일본의 침탈야욕을 확인했고, 두 섬에 대한 영유권을 다시금 확고히 하고자 강경한 외교를 실행하게 된다. 즉 안용복의 피랍과 송환 처리는 단순한 개인의 월경(越境)문제가 아닌 두 섬에 대한 조선과 일본 정부의 공식적 영유권 다툼, 즉 울릉도 쟁계의 계기가 된 것이다.
조선과 일본 간의 외교협상 끝에 결국 일본의 막부는 두 섬이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했으며 이곳에 대한 출입을 금지할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울릉도와 독도에서의 이권을 노리던 대마도에서 막부의 명령을 지연시키자 안용복은 영토 문제 해결을 결심, 1696년 3월, 재차 도일(2차 도일)을 감행했다. 울릉도에 도착한 안용복 일행은 그곳의 일본 어민들을 몰아내고 추격하는 과정에서 오키주(伯耆州)에 표류했으며 이후 그곳의 태수와의 담판을 결심, 스스로 조선의 ‘울릉우산양도감세장(鬱陵于山兩島監稅將)’이라 칭하고 불법침입을 항의했다.
이 항의와 관련하여 원록구병자년조선주착안일권지각서(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에는 안용복이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에서 말하는 ‘다케시마’와 ‘마쓰시마’임을 설명하면서 자신이 소지하고 있던 조선팔도지도(朝鮮八道地圖)를 꺼내 두 섬이 강원도에 속해 있는 조선의 영토로 분명히 표시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 문서의 말미에 기록된 조선의 팔도 중 하나인 강원도에 “이 도(道)에는 다케시마와 마쓰시마가 속한다”는 주석이 부기되었다. 오키주 태수는 두 섬이 이미 조선에 속하였으니 혹시 다시 이곳을 침입하는 일이 있다면 무겁게 처벌할 것이라고 약속했으며 안용복은 같은 해 8월, 일행과 함께 강원도의 양양으로 귀환했다.
그의 활동은 큰 성과를 거두었고 1696년 에도 막부는 다음과 같이 죽도도해를 금지했다.
先年松平新太郎因州伯州領知ノ節 相窺之伯州米子ノ町人村川市兵衛大屋甚吉 竹島ヘ渡海至干今雖致漁候 向後竹島ヘ渡海ノ儀制禁可申付旨 被仰出ノ由可被存其趣候恐々謹言
이전에 마쓰다이라 신타로가 인주(이나바주)와 백주(호키주)를 영지로 했을 때, 그것을 엿본 호키 요나고의 상인 무라카와와 이치베, 오야 진키치가 다케시마(울릉도)에 도해하기에 이르렀는데 비록 지금까지 어로를 했다고 해도 향후 다케시마로 도해하는 것을 마땅히 금한다고 하셨기에 명령에 따라 그 뜻을 삼가 말씀드립니다.
대마도주는 1696년 10월, 조선의 역관에게 막부의 뜻을 전달하고, 1697년 2월에는 동래부사(東萊府使)에게 서계를 보내 일본인의 울릉도 출어 금지를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이로써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이 재천명되었으며 울릉도 쟁계는 조선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안용복의 도일과 울릉도쟁계의 처리과정에서 일본의 두 섬에 대한 불법침탈을 확인한 조선정부는 보다 적극적인 도서지역 관리체계를 확립하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삼척첨사(三陟僉使) 장한상(張漢相)을 파견하여 실태를 조사케 하였다. 그의 보고를 받은 숙종은 이곳으로의 출입을 금지하고 수토사를 2~3년 주기로 파견하여 실태를 조사함과 동시에 불법 침입한 일본인을 추방하는 수토정책(搜討政策)을 시행하게 된다. 수토사는 월송만호(越松萬戶)와 삼척영장(三陟營將)이 교대로 파견되었으며 수토사의 출발과 귀착은 현재의 울진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수토정책은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적극적인 도서 관리정책으로서 19세기까지 지속되었으며 조선의 두 섬에 대한 분명한 영토인식을 보여준다.